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에게 편지를 보낸 고등학생과 그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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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반가운 이메일을 한통 받았습니다.
사연인즉슨, 경제부에서 카드사를 담당하고 있던 작년 3월쯤이었을 겁니다. 한 고등학생이 다짜고짜 이메일을 보내와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을 멘토로 삼을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친구가 연예인도 아닌, 금융회사 CEO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 게 당돌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현대카드측에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랬죠.
그쪽에서도 처음엔 정 사장께 보고를 드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행히 정 사장도 흥미를 보였죠. 단,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어렵고, 이번 한번만 이 친구가 원하는 질문을 적어 보내주면 정 사장이 직접 답변을 작성해 주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당돌한 고등학교 1학년생과 국내 대표적인 금융회사 CEO의 '은밀한' 인터뷰가 이뤄졌습니다.
당시 문제의 고등학생이 며칠 전 다시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내용은 자신이 작년에 정태영 사장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요즘도 종종 다시 들춰보며 도움을 얻곤 하는데, 이를 주선해 준 제게 고맙다는 얘기를 못한 것 같다며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나이를 한살 더 먹더니 당돌함에 더해 예의까지 갖췄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오랜만에 이 친구가 정태영 사장과 주고받았던 이메일을 찾아 읽어봤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인문학과 학문간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얼마전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새삼 눈에 띄더군요.
사실 당시에 이 둘이 주고받은 메일 내용을 기사화할 생각도 있었습니다. 정태영 사장이 직접 작성한 답장에서 자신의 또래답지 않게 성숙했던 고등학생의 고민을 어깨에 힘을 빼고 그 친구 눈높이에 맞춰 진솔하게 풀어줘 웬만한 전문 상담가의 말보다 유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기자 입장에서 어느 언론에서도 공개된 적 없는 정태영 사장의 세심한 카운셀러로서의 면모를 저 혼자만 보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지면에 실리지 못한 이 둘의 인연은 둘만의 비밀로 남겨진 채 1년반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기회에 저 혼자 보기엔 아까웠던 정태영 사장과 당찬 고등학생이 주고 받은 당시 편지 내용을 공개할까 합니다. 아래 글은 고등학생 친구의 이름만 살짝 바꿨을 뿐, 둘이 주고받은 이메일 '날것' 그대로입니다. 지금에 와서 예전에 썼던 글이 공개되는 것에 대해 정 사장이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도 살짝 듭니다만, 예전에 기사화 여부를 타진해 승낙을 받아놨었던 만큼 따로 말씀은 안 드리렵니다. 정 사장, 괜찮죠? ^^
안녕하십니까? 정태영 사장!
저는 경상도에 있는 00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 김영훈(가명)입니다.
제가 정태영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결심한 것이 3월 21일 이었는데 약 한달 만에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되어 아직 실감이 나지 않고 얼떨떨합니다.
제가 사장을 알게 된 것은 조선일보 기사를 읽고였습니다. 2월 13일자 Weekly Biz 섹션에서 현대카드, 현대 캐피탈의 ‘인사이트 트립’에 관한 기사와 2월 25일자 조선 경제의 ‘굿모닝 CEO, 위기 때 공격 경영.’ 이라는 기사였습니다. 기사를 읽기 전, 저는 현대카드를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현대카드를 몰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대카드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광고를 통해서 말이죠. 현대카드, 현태 캐피탈 광고들이 저의 기억 속에 있었습니다. 한 예로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를 들 수 있습니다. 사장께서는 한 인터뷰에서 이 광고는 노래는 뜨고 회사는 안 떠 실패작이라고 하셨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광고의 주체가 현대 카드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저에게 더 큰 인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장께서 2003년부터 지금까지 주도해 오신 혁신을 보면 지금의 현대카드사의 성과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사장과의 대화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은 혁신 정신, 창의적 사고, 10대(배우고 있는 한 사람)로서의 자세입니다. 혁신정신과 창의적 사고는 제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어떤 일을 하든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될 가치입니다. 그 가치에 대해 현재 현장에서 으뜸으로 일하시고 계신 사장으로부터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10대로서의 자세는 다소 포괄적이고 신변잡기적인 질문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사장께서 겪으신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충고,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저 위 3개의 주제를 앞으로의 대화를 통해 더 확장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저를 잘 모르시니 대화에 조금 도움이 되고자 저에 대해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하여 최종적으로는 CEO 가 되고 싶습니다. 탁상 공론가 보단 현장에서 이윤을 창출하고 경제학 이론을 내놓기 보단 세계에 신상품을 만들어 보이고 싶습니다. 제조업 보다는 서비스업, IT, 영화, 디자인, Think Tank 연구소, GEN3 같은 컨설팅 쪽에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기업인들은 MS 창업자 빌게이츠,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와 같은 IT 기업 천재들, 현재 좋아하는 기업인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NC소프트의 김택진대표, 삼성 창업자 이병철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독서(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의 책을 좋아 합니다.), 여행(일본은 두 번 여행 해봤고 좋아하는 국가는 영국입니다.), 영화(데이빗 핀처 감독을 좋아합니다.)를 즐겨합니다. 2남 중 장남이구요. 집은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과 LG (전 금성) 그룹 창업자 구인회의 고향 진주입니다. 현재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모르고 부족한 저라 질문이 두루 뭉실 합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 초점을 맞춰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문현답이라고나 할까요?^^
첫 번째 질문!
'CEO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라는 책을 보면 안철수 교수께서 경영은 그냥하면 될 줄 알았는데 MBA 과정을 겪으면서 경영학의 필요성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옛말에 '농사일을 모르면서 하인을 부릴 수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반해, 스타 CEO 라는 말처럼 몇몇 경우를 보면 어떤 회사의 분야를 잘 모르는 경영인을 영입하여 회사를 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경우처럼 IT 분야에 재능이 있어 창업하여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경영을 해냅니다. (빌게이츠의 경우 나중에 스티브 발머를 고용하긴 하지만...)
정태영 사장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제가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배우는 것이 좋을까요? 경영학을 배울 의미가 있을까요? 현장에서 익혀서 차근차근 경영인이 되는 코스로 나가는 것은 힘든가요?
SECOND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마인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대체 정태영 사장은 10대때 어떻게 하셨기에, 지금 이렇게 과감한 창의적 혁신가가 되셨을까?"
창의적 혁신가는 현재 최고의 인재상입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추구하고 바라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함양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청소년들은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THIRD
시리어스 하지 않은 말랑말랑한 질문!
CEO의 하루는 어떤 가요? 하루에 몇 시간 주무시고, 몇 시간 일하시나요? 자유로운 회사분위기를 강조하시는데 정태영사장께서는 휴식시간에 어떤 놀이를 하시나요?
FOURTH
사장의 프로필을 보니 학생시절 엄청난 공부 엘리트이셨는데, 학생으로서 선배님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공부를 할 때, 무엇인가를 배울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덕목(자세)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수학적 사고, 계산력, 기억력 등) 그리고 그 덕목을 기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직 질문을 드리는 것도 어색하고, 어떻게 드리는 게 맞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사장의 말씀이 저에게 큰 경험과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편지를 쓰다 보니 일주일의 유일한 자유시간인 일요일 오전 4시간이 모두 지나 버렸네요. 질문을 다듬다 보니 통합되는 것도 있네요.
저의 편지들이 사장을 바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또, 사장의 답장을 받을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됩니다.
다시 한번 저의 부탁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고 즐겁게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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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학생, 안녕하세요?
한두달 전 출장 중에 홍보담당 이사가 반(半)농담으로 김군의 에피소드를 전하였을 때는 처음에는 웃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생각이 나면서 혹시 이 당돌한 꼬마(실례)가 상처받지는 않을지 비슷한 또래의 자식을 둔 사람으로서 걱정도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인터넷 게임이나 하기 쉬운 나이에 신문을 정독하며 세상에 대한 눈을 뜨려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 자세를 심어준 부모님들이 참 교육적이신 분들이라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 정도는 답을 주어서 김군의 인생에 작은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겠다고 생각하고 연락하라 부탁하였습니다. 김군 희망처럼 제가 반복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고 김군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래서도 안되고요. 대신 이번 한번만은 제가 직접 정성껏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주신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미리 말해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김군이 혹시 이런저런 기사를 보면서 상상을 하셨다면 사실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큰 기업을 운영하고 가끔 언론에 포장되어 나오다 보면 무언가 대단한 것이나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알고 보면 다 김군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제 경험으로도 수많은 국내외의 전설적인CEO들을 만나보면 훌륭한 점도 당연히 있으나 한편으론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동시에 느낍니다. 저는 이 점이 더 좋았습니다. 구름 위의 사람들이 아니니 ‘나도 하면 되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니 제 말에 너무 큰 기대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인데요. 정말 정답이 없습니다만 이렇게 답해서는 김영훈 학생이 실망할 테니 제 소신을 있는대로 말하겠습니다. 경영학을 공부해서 꼭 비즈니스를 잘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모르면 많이 힘들고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경영이 나날이 복잡해지는 추세입니다. 주먹구구식의 경영이 생존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영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얼 배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 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알아야 경영학 책도 골라서 볼테니까요. 자긴 모르고 전문경영인을 쓰겠다는 소리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본인이 잘 알아야 사람도 잘 쓰고 유능한 사람이 일하러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학부에서 경영학 전공은 반대입니다. 경영학 교수가 목표가 아니라면 학부에서는 문학, 역사, 경제학, 수학, 물리학, 공학 등 조금 더 기초적인 학문을 전공해서 자신의 세계를 깊고 넓게 열어 놓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경영학은 매우 실무적인 학문입니다. 역사나 문학과는 그 깊이가 차이가 납니다. (경영학 교수님들은 노여워하시겠지만) 저 자신도 불문학을 전공하였고 지금 대학에 다니는 두 딸도 학부에서 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고 저는 그런 선택에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언뜻 경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역이지만 이런 곳에서 자신의 사고에 깊이를 주는 일은 일생 자산이 됩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대학들은 학부에서 경영학 전공 자체가 없고 대학원에서만 가르칩니다. 월가에서 만난 많은 금융인들도 학부에서는 전혀 다른 전공을 하였지만 성공하였고 대화와 관심, 취미가 참 다양함을 느꼈습니다. 대신 학부에서 거시,미시경제학이나 회계, 재무 등의 기본적인 과목은 선택으로 들어 놓으면 큰 도움이 되고 상세히는 MBA에서 배우면 됩니다. 특히 MBA를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학부는 정말 다른 분야를 택해 보세요. 학부와 MBA 6년간 경영학을 전공한다는 것이 조금 따분하게 보이지 않으세요?
두번째 창의성에 관한 답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누가 특히 창의적이다 하는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누군들 아이디어를 머리에 짊어지고 다닐 리도 없고요 저도 요즘 창의적이라고 소문나서 가끔 아이디어를 달라는 분들이 있지만 저라고 듣자마자 남다른 아이디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일을 창의적으로 할 수 있는 기본 자세는 제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일에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일을 억지로 하지 말고 재미있어 하며 계속 고민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찾아옵니다. 대충 ‘이 정도면 되었어’라고 하지 말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자세가 있으면 감사하게도 새로운 생각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적당히 하는 사람이 무슨 큰 재능이나 있어서 창조적인 경우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음은 모든 사물에 항상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시면 좋습니다. 저는 ‘이 일은 원래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나 고정된 것은 아니며 개선할 점이 있고 또 다른 혁신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업에서 고정관념 없이 항상 혁신의 여지가 있다고 믿으면 고민하게 되고 고민하면 생각이 열립니다. 스티브 잡스가 ‘휴대폰은 원래 그런거야, 컴퓨터도 다 똑같은거 아냐’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오늘날의 창조적인 성공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 다음은 대학에 가셔서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세요. 여행도 큰 공부입니다. 음악에 빠져도 보고 그림에도 관심을 갖고 카메라의 원리도 익히세요. 농사의 이치도 궁금할 수 있고요 광고 회사의 일도 재미있습니다. IT에 화장품 회사의 원리가 도입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깊이 제대로 알거나 잘 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비교적 많은 분야에 얇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워낙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와인, 카메라, 그림, IT, 패션, 스포츠 등등 다 한 번씩은 훍고 갑니다. 그러고는 조금 안다 싶으면 다른 분야로 넘어갑니다.
별로 좋은 버릇은 아닌데 덕분에 요즘 비즈니스의 추세라고 하는 복합성에 관해서는 큰 장점이 되고 있습니다. IT를 잘해도 디자인을 모르면 좋은 휴대폰을 못 만드는 세상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어느 한 분야에 심취했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았던 분들은 아직도 그 모습만 기억하고 저를 IT에 해박한 사람 또는 와인을 정말 잘 아는 사람으로 오해하시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도 다른 분야의 여러 회사를 공부하는 취미가 있습니다. 금융을 하는 사람이 항공 회사, 마케팅 회사, 미술관 등의 운영을 공부합니다. 한 예로 지난 달의 어떤 토요일에는 오전에는 새로운 농작물 재배법을 개발한 분을 찾아가서 배웠고 오후에는 파주의 신도시를 찾아 가서 건축물들을 보았으며 저녁에는 마사이족과 함께 생활하신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광범위한 지식(?)은 지금은 금융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머리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다가 언젠가는 다른 지식들과 결합해서 귀중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세번째 질문인 제 생활의 모습인데요 별로 권할 만하지 않습니다만 있는대로 말합니다. 평소에는 하루 5시간 정도 잡니다. 잠이 부족하다 보니 주말에는 열 시간도 자는 경우도 있습니다. 식사 약속 등을 별로 좋아 하지 않아서 점심, 저녁을 회사에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외 약속이 다른 CEO에 비해서 매우 적은 편입니다. 특히 점심 약속을 싫어합니다. 두시간 정도가 없어지는데 그 시간에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어디 나가서 비생산적인 대화를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CEO로서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죠.
저녁 약속이 없는 날에는 대개 8시에서 9시 사이에 퇴근합니다. 취미 생활은 위에서 말한대로 많이 보고 다니는 거라고 해야 하나요. 시간 소비가 많아서 골프는 안칩니다. 대신 운동을 하죠. 바둑이나 노름 같은 잡기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퇴근해서 친한 사람들과 와인 한두 잔 마시는 낙은 있습니다. 하루 내내 회의와 이메일 처리로 거의 밀려다니는 편이고 방에는 소파도 없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사장들이 소파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꿈 같은 이야기이고 실상은 화장실 갈 틈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생 시절의 조언입니다만 저 자신이 워낙 모범적이지 못하여서 자신이 없네요. 고등학교 때는 유화 그리고 시 쓰는 일에 심취해서 점수가 급전직하 했었고 대학 때는 항상 교수님들께 놀러만 다닌다고 혼났고 졸업 후에는 광고 공부한다고 취직도 안 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백수여서 부모님들의 걱정거리였습니다. 저에 비해 김영훈 학생은 오히려 저의 스승격이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하고도 성공했을 리가 있느냐 거짓말이다 라고 하겠지만 정말입니다. 저는 학생 때 내내 그리 모범적이지도 않았고 상당히 특이하다는 (좋지 않은 의미에서) 말은 정말 많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대신 집중력은 매우 강했고 자존심이 있어서 몇 번 도약한 적은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반 60명 중에 한 20 등 하는 실력이었는데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서 부회장에 당선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날 교감 선생님이 저의 어머니를 부르셔서 ‘워낙 부회장은 우수한 학생이 해야 하는데 댁의 아들은 그렇지 못하니 자진해서 관둬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에 충격을 먹고 일주일 내내 밤을 새서 다음 시험에 전교 일등을 하였고 그 다음도 거의 계속 1,2 등을 하였습니다. 반 일등도 못해본 사람이 일을 낸거죠.
대학 졸업 후에도 영어도 잘 못하였고 경영학도 잘 몰랐는데 놀다가 공부나 할 겸 MBA나 가자 라고 마음 먹었는데 친구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제와서 무슨 유학이냐는거죠. 그 말에 오기가 나서 일년을 매일 5시간만 자고 유학 시험과 기타 준비를 하였고 결국은 남들보다 훨씬 좋은 학교에 갔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모든 유학시험 책을 풀었고 영어 단어를 고등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암기하였습니다. MIT에 가서는 처음 수학 수업에서 난생 처음 D를 받은 것이 저를 많이 자극하고 열심히 몰았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을 예로 들었는데 정말 좋은 취미입니다. 계산력이나 암기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점점 진도가 나가다 보면 수학에서 숫자를 다루지 않고 논리를 다루기 때문에 논리적 사고 방식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역사도 꼭 챙기셔야 할 과목이고요. 영어하고 한자에 신경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김군 시대에는 영어를 아주 잘 해야 합니다. 저의 세대만 해도 소통이 목적이었지만 김군의 세대에서는 유창해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영어가 부자유로움은 문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시기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자를 잘 하셔야 합니다. 한국 사람은 결국 아시아를 배경으로 일합니다. MBA졸업하고 미국 등지에서 일하던 친구들도 결국은 한국,홍콩, 싱가폴 등으로 다 모입니다. 한국 사람한테 남미나 유럽 시장을 맡길 국제적인 회사는 없습니다. 아시아를 배경으로 우수 인재 취급을 받으려면 한자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한자는 한국어, 중국어, 일어의 기본이 됩니다.
끝으로 당부의 말 한마디만 더 합니다. 제가 보기엔 김영훈 군은 나이 또래에 비해 많이 성숙하고 부모님들도 자랑스러워 할 학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 지나친 성숙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장래의 할 일에 너무 이른 나이에 함몰되지 마세요. 현대카드 사장과의 대화보다는 친구들과의 치기 어린 대화가 아직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사업을 꿈꾸고 자신을 사업하는 기계로 조련하면 조급한 마음에 지칠 수도 있고 여유, 포용력, 균형 등과 같은 더욱 중요한 단어들이 경시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학교 공부에 전념하고 신문을 읽으며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라는 소양을 쌓는 정도가 제일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김군 스스로의 순수함과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무한한 잠재력에 아직은 더 시간을 주고 즐기셨으면 합니다. 젊음의 가장 큰 무기가 끝없는 불확실성 아닌가요?
대화 재미있었고 저도 글을 마치려 합니다. 출장중에 잠시 빈 시간이 있어서 답신을 합니다만 덕분에 저녁 먹을 시간이 사라졌네요. 좋은 학생, 좋은 친구, 좋은 가족이 되어서 열심히 하면 기회는 몇 번이고 찾아 옵니다. 이 세상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내버려 둘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어디에선가 자신이 소망하는 일을 재미있게 하는 영훈이를 떠올리니 벌써 즐겁고 고맙기까지 합니다. 훗날 성공하면 찾아와서 밥 사세요. 그때쯤은 저는 은퇴한 후 치매라서 자세히 설명해야 김영훈이 누군인지 알아볼 테니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정태영 보냄